중학생 때, 단짝처럼 붙어 다니던 이성친구가 있었다. 1년 동안 교실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짝을 바꾸었는데 이상하게 매번 서로 짝꿍이 되어 나중에는 담임 선생님까지 당연하게 여겼다. 방과 후 학원도 같이 다녔는데, 하루는 그 친구가 문제집을 집에 두고 왔다며 하굣길에 같이 들렀다 가자고 했다. 집에는 가정주부이신 친구의 어머니가 계셨는데, 지금 생각해 보면 공부는 고사하고 매일 사고만 치던 아들놈이 평소 똑똑하다고 얘기하던 반 친구를 데려오니 내심 기분이 좋으셨던 것 같다.
친구가 방에서 학원 갈 준비를 하는 동안 아주머니께서 밥도 못 먹이고 보낸다며 나에게 사과를 깎아주셨다. 나는 그 때 우리 엄마가 아닌 다른 엄마가 나를 위해 과일을 깎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. 과도를 쥐고, 껍질을 돌려 깎고, 과육을 써는 방식이 우리 집과는 사뭇 달라서 단지 사과를 깎는 모습 만으로 내 가족과는 전혀 다른, 오직 이 가정만의 역사와 추억, 언어와 공기가 존재해왔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. 사과가 쪼개질 때마다 퍼지는 상큼하고 달콤한 냄새는 맞벌이인 우리 집과는 달리 하교 후 사과를 깎아줄 엄마가 집에 존재한다는 부러움의 냄새였다.
그렇게 깎아주신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순간 악 소리를 내며 나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. 당시 나는 치아교정 중이었는데, 장치를 조인지 얼마 되지 않아 조금이라도 딱딱한 걸 씹으면 이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아렸다. 방에서 나온 친구는 나를 가리키며 얘는 완전 할머니라 잘게 잘라줘야 먹을 수 있다고 놀렸다. 당황한 아주머니는 잘라놓은 사과를 나를 위해 반대편이 비칠 만큼 더 얇게 잘라주셨다. 팔랑거리듯 얇은 사과를 두 손으로 쥐고 덜 아픈 치아를 찾아가며 간신히 먹고 학원에 갔다. 아주머니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집의 구조와 식탁의 색깔, 의자 등받이의 모양, 그리고 복어회처럼 얇았던 사과의 맛은 신기하게 아직도 가끔씩 생각난다. |